출처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308&aid=0000033884
e스포츠 시청자 수와 산업 규모는 매해 성장세다. 그러나 업계 내부에서는 장밋빛 전망만 내놓지 못한다. 수익 구조와 노동문제 때문이다.
9월25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 e스포츠 센터에서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e스포츠 경기가 펼쳐졌다. ©연합뉴스
e스포츠는 유망 분야다. 2000년대 이후 게임산업의 성장 가능성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적은 없다. 동남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에도 초고속 인터넷망이 보급되면서 더욱 탄력을 받았다. 지난 10월10일부터 11월19일까지 한국에서 열린 ‘〈리그 오브 레전드〉 2023 월드 챔피언십(월즈)’은 e스포츠의 현재를 체감할 기회였다. 관중 수만 명이 고척스카이돔 경기장과 광화문광장, 영화관에서 결승전을 관람했다. 온라인 관중은 전 세계 수억 명으로 추정된다. ‘1000억원 이상의 경제효과를 냈다’는 평도 나온다. 그러나 내막을 좀 더 살피면 장밋빛 전망만 갖기 어렵다. 지속가능성 면에서 난제가 여럿 도사리고 있다.
수치상 e스포츠의 인기는 우상향 중이다. 네덜란드의 e스포츠 시장조사업체 ‘뉴주(Newzoo)’의 2022년 ‘세계 e스포츠 산업’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e스포츠 산업 규모는 13억8400만 달러(약 1조8000억원). 2020년부터 연평균 13.4%씩 성장하고 있다. 보고서는 세계 e스포츠 시청자 수를 5억3000만명으로 봤다. 8.1%씩 시청자가 늘어나는 추세를 볼 때 2025년에는 6억4000만명이 e스포츠를 관람하게 될 것이라고 이 업체는 예상했다. 젊은 관객이 대다수이지만 ‘청소년 문화’로만 보기에는 연령대도 다양하다. 영국 마케팅 조사업체인 글로벌웹인덱스의 2019년 자료에 따르면, 시청자 3분의 1가량은 35세 이상이다. 2021년 LCK(〈리그 오브 레전드〉 한국 리그)는 설문조사 결과 시청자 56.7%가 직장인이라고 밝혔다.
e스포츠의 급격한 성장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불러온 바람이기도 했다. 영화관이 문을 닫자 OTT가 활황을 맞았듯, 대면 스포츠 리그가 중단되자 다른 볼거리가 주목받은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스포츠와 e스포츠의 희비는 팬데믹 이전에도 이미 조금씩 엇갈렸다. 2020년 닐슨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최고 인기 종목인 미국 풋볼 리그(NFL) 결승전(슈퍼볼) 시청자는 2015년 1억1444만명에서 2019년 9819만명으로 매해 감소했다. 메이저리그 결승전(월드시리즈) 시청자 수 역시 2019년 1412만명으로, 2016년의 3분의 2 수준에 머물렀다.
e스포츠가 인기를 끌자 투자자가 늘었다. 유명 전현직 스포츠 스타와 프로스포츠 클럽이 앞장섰다. 대표 사례는 전설적인 브라질 축구선수 호나우두다. 호나우두는 2017년 5월 자국에서 열린 ‘〈리그 오브 레전드〉 미드시즌 인비테이셔널(MSI)’ 대회 결승 후 시상자로 나섰다. 브라질 프로게임단에 투자한 그는 이 자리에서 “e스포츠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불러모으고 있다. 브라질에서도 축구처럼 인기가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축구 선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전 MLB 선수 알렉스 로드리게스, 전 NBA 선수 샤킬 오닐 등이 e스포츠 클럽에 투자했다.
인기 점점 늘어도 구단은 적자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e스포츠는 대중적으로 주목받았다. 한국 최고 인기 게임이자 세계적으로 ‘3대 e스포츠’로 꼽히는 〈리그 오브 레전드〉 종목에서 한국팀이 금메달을 따 대표팀 선수들이 병역 면제 혜택을 얻었다. e스포츠의 달라진 위상을 드러낸 일화도 있었다. 〈리그 오브 레전드〉 대표팀 ‘페이커’ 이상혁을 선수촌에서 마주친 뒤 함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해외 선수들이 많았다. 대회 전 중국이 제작한 홍보자료에서 페이커는 ‘가장 보고 싶은 외국인 선수’로 소개됐다.
게임계 밖에서도 e스포츠를 올림픽 종목에 포함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9월22일 ‘e스포츠가 국제 스포츠 대회를 다시 활성화할 수 있다’는 기사를 냈다. ‘올림픽은 아시안게임에서 배워야 한다’가 부제였다. e스포츠가 가져다줄 막대한 수익만 논거는 아니었다. 기사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미국 시청자는 평균 39세였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 53세로 올랐다. 올림픽이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성을 가지려면 e스포츠를 종목으로 지정해야 한다”라고 썼다. 그러나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2018년 “사람을 죽이는 묘사가 담긴 게임은 올림픽 가치와 일치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게임의 폭력성’이나 ‘e스포츠가 스포츠인지’는 오랜 화두이지만, e스포츠 업계가 당면한 고민은 다른 데 있다. 지표는 e스포츠의 흥행을 드러내는데 프로구단들이 매해 적자를 낸다. 성적을 잘 내고 인기가 많은 팀일수록 적자액이 더 높다. 페이커가 소속되어 있는 T1도 다르지 않다. 2020년 110억원, 2021년 약 211억원, 2022년 약 166억원으로 매해 적자를 기록했다. 우승팀이 적지 않은 상금을 얻고 상품 판매 수익, 대기업 후원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승 전력을 유지하려면 ‘A급’ 선수 5명이 필요하고 이 선수들은 다른 선수보다 몇 배, 몇십 배 연봉을 받는다. 각 팀은 정확한 액수를 공개하지 않으나 국내 〈리그 오브 레전드〉 스타 플레이어의 경우 연봉은 10억원에서 20억원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최고 연봉자인 페이커의 연봉은 100억원에 가깝다. 돈을 많이 들인다고 해서 우승한다는 보장도 없다. 천문학적 자금을 들인 ‘슈퍼팀’ 다수가 이름값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시즌이 끝나면 해체된다.
9월29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가운데 단상). ©연합뉴스
구단으로서 나가는 돈은 매해 늘고 이를 충당할 만큼 벌지는 못한다. 수익 구조 때문이다. 전통적 스포츠 구단은 수익에서 경기 입장료와 중계권료 비중이 높다. 하지만 e스포츠는 상대적으로 현장 관람의 매력이 떨어진다. 10분 만에 티켓이 매진된 이번 월즈 결승전은 몹시 예외적 사례다. 국제대회나 일부 인기팀 경기를 제외하면 시즌 중 경기장은 좀처럼 꽉 차지 않는다. ‘비대면 경기와 관람이 가능하다’는 종목 특성은 팬데믹 시기 e스포츠에 호재였지만, 뒤집어 말해 관람료를 충분히 벌어들일 수 없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비대면 관람료’인 중계권료만으로 유지하기도 어렵다. 대부분 국가가 e스포츠를 TV에서 중계하지 않는다. 주류인 온라인 중계는 TV에 비해 중계권료가 낮다. 산업은 기업의 후원에 기댄다. 뉴주의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e스포츠 산업의 수익 64%는 기업 후원에서 나온다. 중계권은 15%, 입장권은 7%에 머무른다. 기업이 홍보 효과가 불충분하다고 여겨 후원을 중단하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더 근본적 불안 요소도 있다. 업계 사정을 피부로 느끼는 관계자들이 e스포츠 종목의 인기가 언제까지 갈지 확신하지 못한다. 동네마다 PC방이 있고 〈리그 오브 레전드〉가 ‘국민 게임’ 수준인 한국에서 체감하기 어려운 위기감을,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은 느낀다. 2017년 월즈 우승자이자 북미 리그인 LCS에서 활동하고 있는 ‘코어장전’ 조용인 선수(팀 리퀴드 혼다)는 〈시사IN〉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롤의 인기는 한국을 따라잡지 못한다. 국제대회 성적이 안 좋고 세대교체에 실패해 매력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처음 미국에 온 2019년에는 북미 리그 연봉 수준이 높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살짝 떨어진 느낌이다. 열정이 없는 선수가 ‘은퇴하기 전에 돈 벌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북미에 오는 게 지금은 어렵다.”
한국은 왜 북미보다 성적이 좋을까? 어떻게 중국팀을 판판이 꺾고 우승한 페이커나 지난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데프트’ 김혁규의 매력적인 서사를 꾸준히 낳고, 게임의 인기가 유지될 수 있을까. 조용인 선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국인이라서 이렇고 미국인이라서 저런’ 건 없다. 다만 양국 리그에 문화 차이가 있다. 야간 자율학습을 생각하면 된다. 한국은 코치와 선수, 선수와 선수 간에 수직적 분위기가 있고 연습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미국은 수평적이고 자율적이다. 스스로 마음먹지 않으면 열심히 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말하자면 한국 선수들은 성적 압박이 크고 노동시간이 길다. 그래서 성과가 좋다.
‘페이커 이후’ e스포츠의 미래는?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2018년 “폭력 게임은 올림픽 가치와 일치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AFP PHOTO
e스포츠 선수들은 대부분 미성년자 때부터 프로를 준비한다. 보통 중학교, 빠르면 초등학교 때 개인적으로 게임 랭킹을 올린다. 뛰어난 재능을 갖춘 선수라도 랭킹을 올리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프로팀 연습생을 거쳐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10대 중후반에 데뷔하는 선수가 많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2 e스포츠 실태조사’는 e스포츠 프로게이머 생활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선수들은 주중 일평균 7.7시간, 주말에는 7.2시간 훈련한다. 이 밖에도 개인적으로 몇 시간씩 게임을 하는 선수가 많다. 설문에 응답한 국내 선수 88.8%는 25세 미만이었는데, 그중 67.2%가 향후 경력이 5년 이하라고 봤다. 프로선수 애로사항 1위로 꼽힌 것은 ‘신체, 심리 등의 건강 문제(46.4%)’였다. 많은 프로팀이 밤에 연습을 시작해 새벽에 끝낸다. 성적 압박과 수직적 분위기, 야간 노동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건강에 좋을 수 없다. 구단은 재정난을 호소하지만, 선수로서도 타 종목보다 훨씬 짧은 커리어 동안 최대한 연봉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e스포츠 업계에는 ‘페이커 이후’에 대한 고민이 있다. 스타성과 경력을 갖춘 페이커가 수년 뒤 은퇴하면 그 인기에 가려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가 불거지고, e스포츠 산업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다. 올 시즌 페이커가 부상으로 이탈했던 기간 LCK 경기 시청자 수는 최대 3분의 1가량 줄어들었다. 올드 게이머가 퇴장하면 부실한 수익 구조와 노동문제만 남아 사상누각처럼 무너질 수 있다. 국내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스타크래프트〉 리그 역시 같은 문제를 겪다가 승부조작 사건으로 붕괴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11월20일 T1 선수단에게 보낸 월즈 우승 축전에서 “앞으로 정부는 게임산업이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세계시장을 선도할 수 있도록 든든하게 뒷받침할 것”이라고 썼다. 11월19일 월즈 결승전을 현장에서 본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발표하기 어렵지만 e스포츠가 국민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페이커와 T1의 성과에 가려진 e스포츠의 고민을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있는지는 미지수다.